* 즐거운 산행

인왕산(仁王山) 과 서울 이야기...

율전-율리야 2007. 11. 23. 00:25
인왕산(仁王山) 과 서울 이야기...
어릴 때부터 가까이 살면서 바라만 보았던 인왕산(仁王山)  .....
삐뚜러진 허리로 절뚝거리며...
동기생들과  함께 하지도 못하고.. 쉬운 길로 올라 갔다가
쉬운길로 내려와 택시타고 합류 하였습니다.
여기저기서 단편적인 이야기 꺼리를  짜깁기한 글에다가
나 홀로 걸은 산행길의 사진 몇 장을 첨부 합니다.
경복궁 서쪽에 아름다운 암골미를 자랑하는 이 산(仁王山)은...
 68년 1.21사태 이후 入山이 전면 금지 되었다가 
93년 3월 문민정부의 첫 선물로 25년 만에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山이지요. 
<범바위와 인왕산 정상>

조선 개국 초기에 서산(西山)이라 지칭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仁王山)이라 불리게 되었다 하며... 
본래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인데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하였다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인왕산의 표기를 ‘仁旺山’이라 하였으나, 
1995년 ‘仁王’으로 옛 지명이 환원되었지요. 
인왕산 정상의  높이는  338m......
 약수터 다니는 기분 이지만.., 산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시원 하더군요. 





태조 이성계 이래 600여년을 왕궁과 한양을 지켜보고 온 인왕산...
할 말도 많으련만....묵묵하게 서 있을 뿐....
<아래 두 사진은 정상 부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의 하나하나에 많은 전설과 애환을 붙여 놓았더군요.
얼굴바위, 치마바위,  모자바위, 선바위, 
 등이 저마다 기이한 모습들을 뽐내고 있더라구요.



치마바위는 중종과 폐위된 신씨(愼氏)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 바위... 
연산군을 몰아내는 반정이 일어난 후....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 시절 정승을 지낸 신수근의 딸인 
왕비 신씨(愼氏)를 지켜려 하지만 역적의 딸은 결국 폐위 된다

중종은 신씨가 보고싶을 때면 누각에 올라 신씨의 집 쪽을 바라보곤 했는데, 
신씨가 그 사실을 전해 듣고 집안 위쪽에 있는 인왕산 큰 바위에 
자신이 궁중에서 입던 분홍색 치마를 눈에 띄게 덮어 놓았다고 합니다. 
중종은 그 치마를 보며 신씨를 향한 애절한 감정을 삭혔다는 것... 
무려 51년간 치마를 널었다가 영조때 복위된 단경왕후 랍니다. 
선바위는 두 덩어리의 거석으로 구성된 모양이 마치 인물상을 연상케 하는데, 
특이하게도 바위에 수직으로 홈이 패이고 구멍들이 나 있었습니다. 

고깔을 쓴 장삼 차림의 승려를 닮은 오른쪽 바위가 
승려의 화신이 돌부처로 변한 모습이라 하여
 ‘선암(禪岩)’으로 불리우게 되었다고 전해 오는데.... 

 이곳에 암자를 짓고 신도들의 기원을 염불해주는 만혁스님은
이곳 선바위에 얽힌 이야기를 이렇게 이야기 한답니다. 
'우선 바위 형상을 장삼차림의 스님 상으로 보아 
참선하는 의미의 ‘선(禪)’바위라 하는 명칭은 잘못이며,
 원래 제사터라는 뜻의 ‘선(墠)’바위가 옳답니다. 
이곳은 무학 대사가 이성계를 위해서 기도한 장소에서 연유했기 때문에 
선암 墠岩으로 이름 되었다는 것이지요. 
무학 대사의 1백일 기도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이은 성공적인 조선 건국과 
잘 맞아떨어졌다 하여, 선바위는 한 가지 소원만을 지성을 다하여 빌면
 성취되는 장소로 유명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거암의 선바위는 무학 대사와 이성계상이라고도 하며, 
이성계 부부상이라 전해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바위에는 작은 돌을 가지고 표면을 문질러서 붙이면 
더욱 효험이 높다고 하여 ‘붙임바위’라 부르기도 한다네요. 

그렇게 치성을 드린 흔적이 바위의 몸체에 여기저기 보이고, 
요즈음에도 참배객들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선바위 바로 아래에는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천황의 신사를 세우면서 이곳으로 옮겨 지은 
중요민속자료 제 29호인  무속신당(巫俗神堂) 국사당(國師堂)이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
태조 5년(1396)에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태종 4년에는 호국의 신으로 삼았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국사당(國師堂)을 목멱신사(木覓神祠)라고도 불렀는데.... 

이 堂은 1925년에 남산에서 이곳으로 이전되었는바, 
이것은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저들의 신사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국사당이 높은 곳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랍니다. 
이전 장소를 인왕산 기슭으로 택한 것은 
태조와 무학대사가 그곳에서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현재 국사당에는 태조와 왕비 강씨 부인상을 비롯해서 
무학대사, 나옹, 최영장군, 민중전상과 산신, 용왕신, 칠성신, 삼불제석도 등
 중요민속자료 제 17호로 지정된 무신도들이 모셔져 있다는데
내부는 보지 못 하였습니다. 
 국사당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길은 양옆에 온통 00사, xx암 등
무속인의 마을 이더군요.
여기가 어디냐고 물어보니 무악동이라 하더군요.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太祖) 이성계는 ...
고려의 도읍지였던 개성을 버리고 1394년 10월28일 한양, 
즉 지금의 서울을 새 도읍지로 정했는데.... 
도읍의 본격적인 건설 사업은 그해 12월 정도전(鄭道傳)에게 
도시 건설을 착공하게 함으로서 시작되었답니다. 
도성(都城)을 세울 때, 북악산을 주산(主山), 남산(南山)을 안산(案山), 
낙산(駱山)을 좌청룡(左靑龍),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았답니다.
경복궁을 선두로 종묘와 사직을 완공하는 등 궁성의 모습이 갖춰지고 
1396년 전국 각지에서  12만 명을 뽑아 
도성의 성곽을 시작 98일 만에 완공하였답니다. 

 성에는 사대문(四大門 : 東―興仁之門, 西―敦義門, 南―崇禮門, 北―肅淸門)과 
사소문(四小門:北東―弘化門, 南東―光熙門, 北西―彰義門, 南西―昭德門)을 냈으며 
흥인지문(동대문)만은 옹성을 쌓았고 
숙청문(숙정문)은 암문(暗門)으로 하여 문루를 세우지 않았다 합니다. 
성곽의 길이는 17km로 
서울 성곽은 현재 사적 10호로 지정되어 있답니다.
 서울시내 성곽의 유실된 부분도 복원계획도 세워져 있더군요.

인왕산하면 호랑이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년전, 인왕산은 호랑이의 횡행으로 난동이 끊이지 않아 
경복궁 내정이나 창덕궁 후원에까지 들어와 소란을 피우고 
고양등지의 민가에까지 침입하여 그 피해인원이 수백명에 달하자 
조정에서 군대를 출동시켜 호랑이 잡이에 나설 정도였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는 말이 전해 지고 있답니다. 
또 하나는 ....
조선 후기 화가인 겸제 정선(1676∼1759)이 비온 뒤의 인왕산 모습을 그린 
“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그림..... 크기는 가로 138.2㎝, 세로 79.2㎝ 

조선 영조 27년(1751)에 그려진 이 그림은 
정선이 75세의 만년에 그린 것임에도 불구하고 강한 필묵이 
보는 이를 압도하는 정선 진경산수화의 걸작... 
 그의 400여점의 유작 가운데 가장 크고 그의 화법이 잘 나타난 
조선 후기 실경산수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 된다 네요. 
국보  제216호로 지정되어 호암미술관에 소장 되어 있답니다.
 <인왕제색도>를 보면 산수화의 걸작이라는 것을  넘어 
절망 끝에서 피어나는  우정의 분위기..진실 된 휴머니즘이 
녹아 있다는데 더 큰 감흥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 내용인즉....정선이 조선후기 진경산수의 거장 이였다면 
사천은 일만 삼천수가 넘는 시를 지은 대문장가 이자 진경시인이었답니다.  
 겸재와 사천은 10대부터 스승인 김창흡 아래 동문수학한 벗이였구요. 
각각 81세, 84세까지 장수하면서 한동네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의지하며 자란 형제 같은 사이였답니다. 
바로 <인왕제색도>는 사천 이병연이 병들어 있을때....
어두운 비구름이 개이듯 병이 나아 저 당당한 인왕산처럼 
다시금 웅장하고 굳건한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려낸 그림이랍니다. 
겸재가 사천의 집 주위를 수목들이 호위하듯이 빙 둘러 그려낸 것만 보아도
 사천이 병을 이겨내고 당당한 소나무처럼 일어나길 바라는 겸재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왕제색도>는 지금의 궁정동 칠궁 담장 너머에 있던 
사천의 집(취록헌) 쪽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 이랍니다. 
산행 시작후 2시간 남짓 걸려서..
사직공원에서 합류하여 지산이 베풀어준 식사 시간에만 용감 하였습니다.
식사후... 서울역사박물관을 관람 하였답니다.



 
인왕산 곳곳엔 경비초소와 경계병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
휴일 다음날은 출입이 안 되며..야간에도 산행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 인왕산은 이조 500년과...한양 600년...
일제치하의 아픔과 ...남북분단의 현실이...
기묘하게 얽기고 설켜 어우러져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