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강한 삶
[12.22] 홀로 걷는 서울 도성(都城) 탐사기행(3)
율전-율리야
2008. 12. 30. 14:39
[12.22] 홀로 걷는 서울 도성(都城) 탐사기행(3) 도성탐사 3일째날...아침기온 영하 9도로 날씨가 매우 춥습니다. 지하철 6호선 “버티고개역“에서 도성(都城) 을 향하여 접근 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고개가 바로 “버티고개”로 “남소문터”라고 알고 있기에 찾아 가려는 것입니다.“버티고개”는 한남동 쪽에서 장충동 국립극장(해오름극장)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입니다. 양쪽의 절토된 것을 감안하면...당시에는 꽤 높은 고갯길이라 생각 됩니다. 이 길은 최초 성곽을 쌓을 때는 없었었는데 ... 그후 “한강진”으로 들어오는 물량이 많아짐에 따라 세조 3년(1957년)에 한강진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지름길인 이곳을 택하여 고갯길을 만들고 도성문을 내었답니다. 당시 통행이 잦지 않고 한적한 고갯길 이었나 봅니다. 그런 탓으로 도적들이 자주 나타나서 약탈과 살인등 불미스런 사고가 빈번히 발생하여 순라를 돌았다고 합니다. 순라를 돌때 번도! 번도! 라고 외치며 도적들을 쫓고는 하였는데.... 그 번도! 라는 말이 - 번치-번티-버티가 되어 지금 “버티고개”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곳을 찾아 갔더니 “남소문터”라는 표지석이 있었습니다. 다소 높은곳의 나무 밑이라 찾기는 쉽지 않지요...
이 고갯마루에는 물맛이 좋은 약수터가 있었는바 오고가는 사람은 물론 아랫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즐겨 마셨기에 “약수동”이란 동네 이름을 남긴 채 지금은 없답니다. 남소문을 건설 할 당시 이곳의 치안문제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던중 때 맞추어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懿敬世子)가 죽었는바.. 이는 동남쪽에 성문을 내어 상서롭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라는 음양가(陰陽家)의 잇단 상소를 받아들여 예종 원년에 성문 이름도 옳게 얻지 못하고 철거해 버리고 말았답니다. 길을 따라 걷다가 자유연맹 안으로 들어가 뒷산으로 올라 갑니다. 멀리 신라호텔이 보이고 약 1.6km의 성곽이 보입니다.
중간에 암문이 하나 있는데... 이곳 주변의 성곽을 둘러 보면.... 몇 번에 걸쳐 보수를 한 흔적이 역역합니다. 600년 역사를 한눈에 보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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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인지 시대별 성곽의 축성기법이 잘 설명되어진 안내 간판이 있습니다.
조금 더 내려가 “금호로”의 큰길을 만나며 성곽의 모습은 끝납니다. 신라호텔 쪽으로 뒤돌아본 성곽의 단면 모습입니다.
“금호로”를 건너 맞은편 신당동 성당 길로 접어 듭니다. 물론 이 길에는 성곽의 흔적은 없으나 “광희문”방향으로의 성곽이 이어졌던 길이랍니다.
가는 길에서 성곽보다 높은 담장위의 멋진 나무 한그루를 담아봅니다.
15분 남짓 걸었을까..? 약 100m 정도의 성곽과 광희문(光熙門)이 보입니다.
주변을 샅샅이 둘러 보다 보니 “문화재관리초소”라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러한 초소가 왜 필요할까? 짐작데로 “숭례문” 화재사고 이후 문화재 관리초소를 운영 한다는 것입니다. 인왕산에서 출발하여... 돈의문-소덕문-숭례문-남소문을 거쳐 왔음에도 모두 소실된 문이어서 정작 성곽의 문은 처음 봅니다. 초소 관리인은 잠겨있는 문도 열어서 친절하게 안내하여 주더군요.
광희문(光熙門)은 보통 수구문(水口門), 시구문(屍口門)이라고 불렸다는데.... 水口門은 청계천 장충동 쪽 물이 나가는 길목이고.. 屍口門이라고 부른 것은 ? 시체(상여)가 나가는 문이라는 뜻이지요. 일제 초기에 "이제부터는 상여가 모든 문으로 나갈수 있다"는 공고가 난 적이 있음을 바꾸어 말하면 그 전에는 상여가 나가는 문이 따로 있었다는 뜻이겠지요. 이문은 지금 속칭 “남소문”이라도 불리고 있지만... 이는 버티고개의 남소문이 없어지고 난후 ..그렇게도 불려 졌을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경 광희문 문루가 무너지고 청계천 지류인 이 일대는 온통 쓰레기장 이었다는군요. 지저분하기 그지 없었고...파리는 들끓고... 그래서 “왕십리똥파리”라는 말이 생겼다지요. 그러다가 1975년 박정희시절에 광희문(光熙門)이 제 모습을 찾았답니다. 맞은편 코리아 스포츠 앞의 성곽의 적은 부분도 찾았습니다.
이제 한양공고 옆을 지나 동대문 운동장을 찾아 갑니다. 이곳에서 청계천 지류의 “2간수문”을 포함하여 일대 발굴 작업이 한창인바 가림막이 모두 쳐져 있기에 현장접근은 불가하였으나.... 시민들에게 그 현장을 보여 주기 위하여 투명창구를 만들어 놓은 것은 현명한 배려라고 생각하며 감사했습니다.
이곳을 지나 조금 더 걸어니 “5간수문”입니다. 서울 성곽이 청계천을 건너는 모습입니다. 물론 지금은 현대식 공법으로 도로가 확장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청계천상의 교량건설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오간수문(五間水門)의 형상으로 퍼온사진입니다.
지금의 “오간수교” 윗부분에는 오간수문의 흔적이나마 잘 보존하려고 한 노력의 결과물이 있습니다. 당시 다섯 칸 수문, “오간수문”의 기둥골격입니다.
오간수문 좌우의 축대 흔적은 도로상에 붉은 페인트로 흔적을 표시하여 두었더군요.
“오간수교” 다리의 난간은 성곽모양이구요 머지않은 거리의 “흥인지문(興仁之門)”즉 동대문 입니다. 숭례문이 국보1호인데 반하여 이 “흥인지문”은 보물 1호입니다. 도성의 좌청룡을 담당하는 문이지요....
인왕산 · 남산 · 낙산 북악산의 내사산(內四山)을 연결하는 약 18km의 도성(都城)에는 숭례문 · 돈의문 · 숙정문 · 흥인지문의 4개 대문과 소덕문 · 창의문 · 홍화문 · 광희문의 4개 소문이 설치되어 있어 통행금지제도를 실시하며 한양을 지키고 치안을 유지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막중한 역할을 하였겠지요. <옛 흥인지문의 모습: 퍼온사진 입니다>
숭례문 추녀마루에는 “잡상”이 11개 였다고 합니다. 잡상 11개는 경회루와 함께 가장 많은 숫자랍니다. 오늘 동대문의 “잡상”숫자를 헤어 보니 윗층은 9개 아랫층은 8개 더라구요. 경복궁 근정전(왕의 집무실격)이 잡상 7개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도성(都城)의 위상은 궁궐보다도 더 높았던 것 같습니다.
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란 성문 이름에만 왜 갈지 之자가 들어 갔느냐에 대하여는 이미 언급 하였기에 생략 합니다. 그러면 왜 이 “흥인지문(興仁之門)”에만 ”옹성(甕城)이 쳐져 있는가....? 두 가지 說이 있더군요 하나는 좌청룡 낙산이 상대적으로 너무 낮아 성문을 더욱 굳건히 하고자 함이요.. 두 번째는 이 지역이 애초에 습지였기에 지반이 약하여 옹성을 쌓아 보완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종로 5가 배오개부터 이 동대문 일대가 온통 늪지 이었는바 ... 고종 6년(1869)에 지금의 동대문을 다시 지을 때에도 소나무를 촘촘히 박아 넣고서야 겨우 터를 다졌다는 기록이 있답니다. 지금도 이 문은 조금씩 틈새가 생겨 센서를 설치하여 기울기를 측정해가는 최신시스템을 부착해 두었더군요..
흥인지문을 둘러본후 “갈비탕“ 한 그릇을 마파람에 개눈 감추는듯... 국물까지 다 마시며 맛있게 점심을 먹고 낙산으로 향 합니다. 성곽의 외곽을 타고 올라가는 창신동 길은 공원으로 아주 잘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암문에서 성안으로 들어가 오르다 보면 왼쪽에 오래된 허럼한 옛집들이 많은 낙산마을.... 사진 메니아들 에게는 아주 인가가 높은 지역인가 봅니다. 우리도 사진을 찍으며 도성을 따라 올라 갔습니다. 이곳 낙산의 성곽과 주변은 아주 잘 정비되어 있어 여태까지 본 서울 성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인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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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전망광장을 비롯하여 곳곳의 체육시설이 유용해 보였습니다. 이건 동대문쪽으로 뒤돌아본 성곽모습 입니다.
낙산 정상에서 혜화동쪽으로 이어지는 성곽의 바깥부분도 성곽에 무질서하게 붙어있는 달동네 같은 많은 집들이 헐리면서 성곽주변을 다듬어 가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대학로 쪽으로는 미개발 지대... 이곳이 개발되면 또 빌딩숲이 될 것인가? 하고 염려 하였는데 다행이도 5층 이하만 건축허가 한다니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지척에 있는 혜화문까지 계속하여 걷지를 못하고 ... 낙산마을과 "이화장"등을 둘러보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정겨운 풍경도 담았지만 성곽이란 주제와는 좀 다르기에... 이는 별도 처리하기로 하고....
오늘의 성곽탐사는 여기서 종료 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