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인왕산에서 내려온 산성을 마지막으로 행촌동에서 본후...
그 지역 단독주택촌의 미로 같은 골목길을 억지로 헤어나와
서울역사관까지 왔는데....
집에 돌아와 인터넷을 뒤져서 도상연구를 다시 해 본 결과...
아래와 같은 地圖를 포함한 기행 글 중에
홍난파의 집 옆 골목으로 올라가면 광희빌라 주차장 뒷벽이
성벽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 나섰으나....
막상 찾기가 생각처럼.. 말처럼..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헤매다가.... 혼자 지껄이기를 ....
“그걸 꼭 찾아야 할 이유가 뭔가?
내가 무슨 유물을 발굴 하는 것도 아니고...성곽을 연구 하는 것도 아닌데...
이 길을 한번 걷는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게 아닌가?“
이렇게 위로하며 .... 마음 편히 그냥 내려와....
“돈의문(敦義門)터”를 찾아 나섰습니다.
미리 파악한 내 메모지에 의하면...
어떤 이는 “경향신문사” 위치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강북삼성병원”위치라고 표기하고 있어...
먼저 경향신문사 주변 일대를 몇 번이고 둘러 보았으나....
아무런 흔적이 보이지 않아 건물 안으로 들어가 물어 보았지요...
안내 데스크에서는 ..그렇다면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자” 하며 친절을 베풀기에...
제가 보았던 자료를 찾아 주었지요..
그분 왈...“내가 여기서 20년을 근무 했는데....” 하며 아쉬워 하더군요...
다시 나와서 강북 삼성병원 부근을 돌았습니다.
얼마동안 헤매다가 사진으로 본...길 가운데에서 아래 표식을 발견했지요.
이곳이 “돈의문(敦義門)” 속칭 西大門이 있었던 자리 표식을 해 둔 것이랍니다.
어떤 형태든 서울 都城을 복원하여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한다는
야심으로 그동안 노력해 온 흔적이었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경향신문사와 강북삼성병원의 사이 큰길 중간 지점 이었습니다.
얼마나 반갑던지 우선 카메라에 한 장 담고...
사진으로 본 또 다른 표식을 찾아야 했는데....
그 부근을 잘 알 것 같은 경찰...부근의 상점에 들어가 물어 보았지만...
“西大門이란 문은 없는 것이다. 돈의문이란 이름은 처음 들어본다...” 등등
거의 관심을 갖거나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왔다 갔다 하며 부근의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우연히 눈에 띄는 돈의문터..표시판....
아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표식물 이었지만...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 횡단보도가 아니면 식별이 쉽지 않았습니다.
횡단보도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그 뒤편에서 아래 조그만 한 표식을 추가로 보았지요.
허잘 것 없는 것에서 보물섬이라도 찾은 양 만족을 느끼며...
주변의 지형을 관찰하니...지금도 고갯마루의 지형인지라...
돈의문이 위치했을 것 같은 확신을 하였지요.....
태조5년 (1396년 9월)에 완공된 돈의문(敦義門)은 아마도 역마살이 끼었나 봅니다.
최초에는 사직동에서 독립문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나...
태종 13년(1412년)에 남쪽으로 옮겨
이름을 서전문(西箭門)으로 바꾸었답니다.
그러다가 세종 4년(1422년) 제2차 도성축성 때
지금 자리로 이전 건립하면서 성문 이름을 원래 태조 때의 이름인
“돈의문(敦義門)”으로 고쳐 불렀답니다.
이때부터 이 돈의문(敦義門)을 세간에서는 “신문(新門)”으로 불렀으며...
그 문 안쪽을 “새문안”으로 불러 왔구요.
이제 소의문(昭義門) - 속칭 서소문터를 찾아 나섰습니다.
제가 메모를 해 둔 것은 “중앙일보사” 위치라고만 알았기에
정동 길-배제학당 길을 따라
중앙일보사 앞에 와서 지형부터 관찰하니..
서소문 고가 도로를 올라가는 사거리 지점이 비교적 높은 지형이어서...
그 부근에서 또 긴 시간을 헤매다가 .....
중앙일보사내 안내 데스크를 찾아가 문의를 했더니....
잠시 기다려 달라 ..담당자에게 문의해 보겠다...하며
전화로 연결 해주는 두 사람에게 교대로 사정을 이야기하고
조언을 구했지만 전혀 단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또다시 길거리에서 탐문 수사를 계속한 끝에
유원빌딩 옆에서 아래 사진을 발견 하였습니다.
태조5년 (1396년) 9월 완공된 소덕문(昭德門, 속칭 서소문)....
성종 3년(1472) 소의문(昭義門)이라고 개칭되어
헐릴 때까지 줄곧 그 이름을 달고 있었답니다..
1914년 일제에 의해 도시계획 명목으로 헐려버리고 말았다지요.
이미 일제시대 초기에 없어진 西大門, 西小門터를 찾기가
안내인 없이는 이렇게 힘들더군요....
숭례문 방향으로 오면서.....
상공회의소 담벼락이 새로 복원된 都城이란걸 알았기에
약 100m 길이의 성벽을 쉽게 찾아 남대문 앞에까지 와서...
사전에 메모해둔 아래 도로상의 붉은 성곽표시도 쉽게 찾아 내었습니다.
태조 5년 (1396년 9월) 건립하고...
세종 30년(1448년) 중건한 숭례문(崇禮門, 속칭 남대문)에 대하여는
언급을 할 필요가 없겠기에 생략 합니다만...
(김봉렬,한국의 건축) 에는 남대문을 이렇게 표기하고 있다더군요
“현재 남한에 있는 가장 오래된 다포계 건물로서 ...
조선 초기 건축의 견실함과 웅장함이 잘 나타난다.
구조형식은 대표적인 다포계 초기형식이며
윗층은 외3출목, 아랫층은 외2출목으로서
아래층보다 윗층의 출목수가 더 많은 희귀한 구성을 보인다.
따라서 윗층의 공포대는 더욱 빗물질화(dematerialization)하여
지붕을 가볍게 지지하고 있는 듯 하며
장중함과 상승감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숭례문 보다 먼져지은 “흥인지문” (동대문)은
국보아닌 그냥 보물로만 지정된데 반하여...
아마 이것이 국보적인 가치를 기술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부근 카메라점에 들어가서 필요한 부품을 몇가지 구입하고....
힐튼호텔 방향으로 남산을 향하여 걸었습니다.
힐튼호텔 부근에 약 70m 구간의 都城이 복원되었다는 메모를 가지고
호텔앞 택시기사에게 물어서 아래 성벽을 찾고
(구)식물원으로 걸었습니다.
식물원에 도착...언제나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이 건물을 담고..
왼쪽 화장실 옆길로 남산을 오르기 시작 했습니다.
17:00가 넘은 시간이어서 이젠 삼각대 없이는 촬영도 어려웠습니다.
5분정도 올라가니..성벽이 보이기 시작 하더군요.
특징적인 요소가 없기에 사진하나 찍고 성벽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17:40분경...정상 직전에 전망대가 있기에...
인왕산과 북악산을 바라보며 야경으로 都城안을 한눈에 담아 봅니다.
성벽을 오른쪽에 두고 오르는 길은 잘 다듬어진 계단길이어서
어렵지 않게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봉수대”가 보입니다.
휴대한 미니삼각대를 펼치고 쭈그려 앉아 봉수대를 담습니다.
조선시대 통신수단은 “파발마”와 “봉화불”....
파발마는 정확성을...봉화불은 신속성을 가진 통신수단 이겠지요...
조선 팔도의 봉화는 이곳 남산(목멱산)으로 전달됩니다.
* 당시 남산을 목멱산(木覓山)이라 불렀답니다.
이 목멱산 봉수대(木覓山 烽燧臺) 는....
복원하며 위치가 조금 바뀌었지만..
경복궁에서 왕이 직접 볼 수 있는 위치라 합니다.
참고적으로 봉화불 신호규정도 옮겨 봅니다.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꽃으로 신호했다 하며....
평소에는 봉화 한 자루를 올리다가
적이 다가오면 두 자루
국경에 다다르면 세 자루
적이 국경을 건너면 네 자루
접전이 시작되면 다섯 자루를 올렸다는 것이며....
조선 말기까지 엄하게 봉수망을 유지 관리해 왔으며...
국경에서 남산까지 신호가 오는데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봉수대 옆에서 “번데기”삶는 냄새가 어찌나 코끝을 자극하던지..
배도 고프고 바람도 차가워 짐을 느껴 그냥 지나칠 수 없더군요.
오뎅 한꼬치 담긴 따뜻한 국물을 마시다보니...생각 나는것....
“막걸리 한잔” 곁들이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서울타워”를 돌아 봅니다.
이는 현대판 최신의 통신 봉수대가 아닐런지요...
“사랑을 약속하고 자물통을 잠근 채 열쇠를 없애 버리는...”
이 젊은이들의 새로운 문화 앞에서...
젊은 한 커플이 사진을 한 장 찍어 달라기에....
정성스럽게 찍어 주었더니....
어느틈에 뜨거운 캔커피 하나를 들고 찾아와 고맙다고 인사를 하더군요.
따뜻한 마음씨에 훈훈함을 느꼈습니다.
얼런 마시지 못하고 주머니에 넣고 손도 녹이고 마음도 녹였습니다.
남산의 성곽이 조명시설을 갖춘다기에 조명 받는 성곽을 보려 했는데....
봉수대 외에는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성벽 중간에 나무가 “아람드리”가 된걸 보면 꾀나 오랜 세월을 견뎠겠지요.
장충체육관 쪽으로 하산을 하다가....
이 길은 전에 걸어 보았을 뿐 아니라 성벽도 이내 없어지기에....
다시 뒤돌아서 버스를 타고 하산 하였습니다.
국립극장-장춘단공원-신라호텔 부근은 다음으로 또 미루어 둡니다.
이 남산(木覓山)에도 안중근 역사관 ...국사당과 조선신궁...등등의 이야기 꺼리가 있으나...
“서울성곽‘ 이라는 주제를 벗으나 삼천포로 빠지면 안 되니...
성곽과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이야기는 가급적 생략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