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5] 홀로 걷는 서울도성(都城) 탐사기행(4 마지막회)
강행하면 하루에도 할수 있는것을 ....
저는 네 번으로 나누어 ...오늘이 그 마지막 날입니다.
혜화문-와룡공원-북악산- 창의문 코스 입니다.
“한성대 입구역“ 5번 출구로 나와 혜화동 쪽을 바라보면
언덕 위에 성문이 하나 있으니 동소문(東小門)인 혜화문(惠化門) 입니다.
원래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 이었는데.....
9대 성종 때 대비가 세분씩이나 되어 창덕궁이 비좁았기에.....
수강궁을 확장하여 “창경궁”이라 하고
그 정문에 홍화문(弘化門)이라 현판을 내 거니...
어쩔 수 없이 중종(中宗) 때 이 동소문 이름을 혜화문(惠化門)으로 개명 하였답니다.
현재의 혜화문(惠化門)은 일제 시대에 도시개발 명목으로 헐려 없었던 것이
1992년부터 3년간 공사하여 현 위치에 복원 된 것이랍니다.
문 옆의 성벽을 따라 돌아가면
혜화문으로 들어가는 가정집 대문 같은 좁은 계단길로 올라가야 합니다.
특이한 점은 혜화문의 천정화가 龍이 아닌 봉황(鳳凰) 이라는 거.....
이는 당시 이 지역에 “새”떼들이 극성을 부렸는바...
새의 왕 봉황(鳳凰) 으로 다스리고자 함이라 하더군요.
같은 개념으로 창의문(彰義門) 천정화로는 “닭”을 그렸는데
그 이유는 문 밖 형세가 “지네” 같아 그 천적인 닭을 그렸다고 하는걸 보면
성(城)을 지키겠다는 의지는 매우 강했던 것 같습니다.
혜화문에서 내려오면 바로 “서울시장 공관”이 하늘높이 보입니다.
밑에서 올려 찍은 사진만 소개 드립니다.
공관의 오른쪽 벽은 성곽입니다.
지체 높은 분의 집이라 잘 보존이 된 것인지...
아니면 복원공사를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일제시대 때 지어진 건물이지만
서울시(市)가 스스로 세운 사적 제10호 도성(都城) 복원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
이 부분은 도성(都城)을 돌면서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습니다.
공관 성벽의 길이는 약 50m는 되는 듯 했구요....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성벽이 모두 담장으로 이용되거나
축대의 역할을 하고 있더군요.
두산빌라 담장이 그렇고....
혜성교회 입구 계단이 그렇고...
경신고등학교 뒷 담장 200여m가 모두 성벽 이었습니다.
이 구간들은 서울 시내 빌딩가와는 달리 단독주택가 이기에
복원하기도 쉬웠을 것 같은데...그냥 방관상태 였습니다.
경신 고(高) 담장이 끝나고 큰길을 하나 건너면 과학 고(高) 뒤편입니다.
여기서 부터는 “와룡공원”을 경유하여
북악산 -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성곽 모두가 완벽하게 복원되었습니다.
이제 부터는 성곽의 흔적을 찾는 수고는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삼청공원의 “말바위” 쉼터를 조금 지나면
"출입통제소"가 있습니다. 화장실도 있고 물도 있으니 쉬어 갈수도 있는 곳이죠...
출입신청서를 기록하여 신분증과 함께 제출하면....
확인 후 통과증을 줍니다. 이를 목에 걸고 가야 합니다.
이 북악산 길이 일반 시민에게 공개 된 것은 2007년 4월부터입니다.
성곽은 잘 정비되어 있고 특히 松林이 아주 보기 좋게 풍치를 더해 줍니다.
처음 가 보는 길이라 설레이는 기분도 있습니다.
걷는 길 오른쪽은 삼각산이 줄곧 적라라하게 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얼마 안가서 이내 "숙정문"이 나타 납니다. 즉 북대문 이지요...
북쪽 산중에 무슨 대문이 필요 했겠습니까?
그래서 인지 이문은 기구한 운명으로 태어난 것 같습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정도전(鄭道傳)은 한양의 성문과
중앙의 종루 이름을 인(仁) 의(義) 예(禮) 지(知) 신(信)의
오상(五常:五行)을 따서 붙였지요.
그리하여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돈의문(敦義門:서대문),
숭례문(崇禮門:남대문), 홍지문(弘知門), 보신각(普信閣)이란 이름을 지었지만....
홍지문(弘知門)대신 “숙청문(肅淸門)”이란 이름을 사용 합니다.
이 문은 애초에는 문루가 없이 암문(暗門) 형태로 지었다 합니다.
그럼에도 당시 풍수학자 최양선(崔楊善)이
“숙정문과 창의문은 경복궁의 양 팔과 같아 ...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건의하여,
축조한지 18년만인 1413년에 폐쇄하였는바.....
1504년(연산군 10년)에
동쪽으로 약간 옮겨 석문만 세워 “숙정문[肅靖門]”이라 불렀답니다.
그 뒤 가뭄이 심하면 음(陰)의 기운이 강한 숙정문을 열어
비가 오기를 기원했으며 장마가 심하면 닫았다고 합니다.
또 순조때 실학자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은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篆散袴)"에
숙청문은 음(陰)의 자리에 있어 열어두면
서울 장안의 여인네들이 바람 난다’고 쓰고 있다네요.
말도 많고 문(門)으로의 역할도 제대로 못한 숙정문[肅靖門]은
현대에 와서도 김신조 무장공비의 만행으로
다시 출입이 통제 되다가 40여 년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와....
볼 수 있게 되었고 이 북악산 길을 걷을 수 있게 된 것이지요.
현재의 이 숙정문 은 1976년 북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하면서 문루를 짓고
“숙정문(肅靖門)’이란 편액을 달아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랍니다.
좀더 걸으면 “촛대 바위”가 나옵니다.
옆에서 보면 전혀 촛대처럼 생기지 않았는데...왜 “촛대바위”라 부를까..??
청운대에서 바라보면 13m의 높이라니 촛대바위라 할 수 있겠지요
바위위에 뭔가 표석이 보입니다.
놀랍게도 이건 일제 시대에 박아놓은 쇠말뚝...!!
물론 쇠말뚝은 제거를 했지만 “잊지는 말자”는 뜻으로 해둔 표식 이랍니다.
그럼 왜 하필 이곳에 쇠말뚝을 박았을까...???
알고 보니 “경복궁”을 정 중앙에서 볼 수 있는 “풍수의 맥” 이라는 군요....
이하 곡정을 경유 청운대-북악산(백악산)정상경유 창의문 까지는
성벽따라 걷는 계단길 등산로입니다.
쉬엄쉬엄 산천구경하며 걷는 제 걸음으로 한 시간 정도 걸려 창의문에 도착 하였습니다.
창의문은 자하문(紫霞門)으로 우리에게 더 익숙하게 불리던 문....
초기에는 숙정문과 함께 폐문(閉門)한 채 일반의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다시 열어 놓았답니다.
이 문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능양군(陵陽君:인조)을 비롯한
의군(義軍)들이 이 문을 부수고 창덕궁으로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문이기도 한데....
문루안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판에 새겨 걸었는바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습니다.
근대사에서는 1.21사태때 무장공비와 싸우다 숨진
종로결찰서장의 동상이 인접하고 있답니다.
이렇게 하여 출발 원점 창의문까지 도성을 한바퀴 돌았습니다.
산행을 하고 내려와 시원한 막걸리 한잔 들이키면서 여담 하듯이 정리하면....
성곽은 18.2km... 97구역으로 나누어
조선팔도 전 지역의 백성을 동원하여 실명책임제 공사로 완료한
당시 가장 큰 토목공사로 "서울도성(都城)"이란 성스러운 이름을 달고 있으며...
사적 제 1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고려 멸망의 원인을 타락한 불교 탓이라 여기며
유교 통치이념인 仁義禮智信을 바탕으로 이 도성을 구상하고 설계하여
직접 진두지휘 하며 성을 만든 이성계와 정도전...
성을 완성하고 제 일성이 “승려들은 이 문을 출입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니 억불(抑佛)숭유(崇儒)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앞장섰던 정도전...
결국 말년에 왕실의 私兵문제와 이성계 후계자 문제에 너무 깊이 관여하여
세자로 책봉된 방석 형제와 더불어 이방원에게 죽음을 당하는
모습을 보며 절대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됩니다.
말년에 이성계가 불교에 귀의 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도성(都城)이 전쟁에 기여했다는 기록은 없는가 봅니다.
결과적으로 내국민을 통제하여 왕권의 권위와 함께
치안유지가 더 큰 목적이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서울 도성이 잘 보존되지 못한 것은 ....
일제시대에 전차를 부설하며 도시개발 명분으로
시내 중심지역 성곽이 많이 없어진 탓이 가장 커겠으나...
병자호란시 남한산성 굴욕중에 “앞으로 조선은 새로운 성을 쌓거나
기존의 성을 보수 하지도 못한다”란 조약 내용이 있었다니...이 얼마나 굴욕 입니까?
그후 70년간 방치되다가 대신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숙종(肅宗)시 이 성을 보수하고 북한산성까지 축조 한 것은
숙종의 자랑이자 용기였습니다.
다소 때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
이 역사적 유물을 원상 복원하여 우리의 자긍심으로 삼고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하겠다는 의지는 당연 합니다.
서울 성곽에 조명시설까지 설치하고 있는데....
서울시장님께서는 이제 자신의 공관부터 옮겨 지으시고
이 서울성곽 복원에 솔선수범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공관을 마련할 재원이 없어서...”
라는 말은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찬란히 빛나는 서울 도성의 4대문 안을 지키고자 했던
이 도성(都城) 길을 따라 걸으며.. 생각하고.. 자료를 정리하면서...
내가 현재에 살고 있는 것인지? 과거에 살고 있는 것인지?
착각 할 때도 있었습니다.
어찌 되었던 600년의 역사 중에서
의심나는 단면들을 확인해 보려는 과정을 통하여
나름데로 유익한 기행이었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우리의 역사도 잘 모르는 제가
독학하며 남의 글을 짜깁기 하는 식으로 쓰 내려간 기행문에
오류나 있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읽어 주시고...격려의 댓글을 주신 분들에게 다시한번 감사를 드리며
서울 도성 탐사 기행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유유히 흘러가는 저 한강과 함께....
이 도성(都城)이 세계 제일의 서울을 만들고 .....
세계 제일의 부국 한국을 만들어 주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