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의 유형문화재] 이종무 장군 묘 [李從茂 將軍 墓] 를 찾아서...
-대마도는 한국땅...-
제가 살고 있는 용인 수지의 문화재 탐방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종무장군 묘"를 찾아 갔는데..
새로 들어선 전원주택이 진입로 입구를 막고 있어 많이 헤맸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찾아가...
묘의 전경과 안내설명판을 찍어온것이 결과물이지만..
저는 오늘 "대마도가 한국땅"이라는 너무나도 귀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어떤 노랫가락에서 "대마도가 한국땅"이란 말을 흥얼거리기는 했지만...
역사적 사실을 깊이 모르고 지내 왔습니다.
이종무장군의 이름도..그의 업적도 ..
쓰시마섬[對馬島]에 대한 이해도 하지 못하고 살아 왔음이 부끄럽습니다.
대마도는 지리적으로 부산에서 49.5km..
일본 후꾸오까에서 147km 떨어진 곳에 위치 함으로 우리나라와 무척 가깝습니다.
농사를 지을수 없는 97%의 山과 척박한 땅으로 이루어진 대마도 ...
대마도 사람들이 특히 기근이 든 해에는 식량을 얻기 위하여 우리나라를
수없이 많이 와서 노략질을 해 갔지요.
고려_조선초기까지 왜구의 노략질은 500 여회에 달 한답니다.
1389년 고려 공양왕때 박위 장군이 병선 100 여 척으로 대마도를 공격한 이후에..
잠시 수그러지는 듯했던 왜구의 준동은
고려 말의 혼란한 정세를 틈타 점차 늘어나는 추세였답니다.
세종때는 서천, 서해안, 해주까지 준동하는 사례가 생겨
조선 정부는 사회혼란이 극심해 질 것을 우려하여 대마도를 기습공격하게 됩니다.
1419년(세종1년)"대마도 정벌 포고문"에는...
"대마도는 옛날부터 우리 땅이었다"로 시작돼
"땅이 막혀 궁벽하고 좁고 더러운 곳이어서 왜적들이 살게 내버려 두었더니 도적질을 일삼으며…"
로 이어지는 정벌 포고문은 당시 조선 정부의 강력한 국방 의지를 짐작케 해주고 있는 것이죠.
정벌군은 삼군 도체찰사 이종무(李從茂) 장군의 지휘아래
전선(戰船) 227척, 군사 1만 7천 명으로 구성되어 6월 중순 경상도 거제 앞바다 견내량에 집결...
6월 19일, 거제를 출발한 조선 원정군은
하루 만인 20일 정오 무렵 대마도 아소우(淺茅) 만에 도착, 이곳을 점령합니다.
조선군은 대마도주(島主) ‘소 사다모리’에게 항복할 것을 종용하지만,
그가 듣지 않자 상륙작전을 결행합니다.
조선군은 투항에 불응하는 왜구 104명을 죽이고 21명을 생포하였으며,
대소 선박 129척, 가옥 2천 여 호를 소각하고
왜구에게 붙들려온 조선인 8명과 중국인 포로 131명을 구하는 전과를 올리죠.
하지만 조선군도 왜구의 기습을 받아 100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조선군이 목책을 설치 하고 주요 길목을 차단하는 등 장기 주둔할 기세를 보이자
대마도 도주(島主)는 왜구의 단속을 약속하면서 화해를 요청합니다.
때마침 닥친 장마와 태풍으로 인한 피해를 우려한 조선군은
대마도주의 화해 제의를 받아 들여, 7월 3일 거제로 개선합니다.
그 후 1436년, 흉년으로 식량사정이 어려워진 대마도주(島主)는
조선 정부에 대마도를 조선에 편입시켜 줄 것을 간청하고,
조선은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하고 도주(島主)를 태수에 봉했습니다.
실제로 대마도가 오래 전 우리 땅이었다는 기록은 사료에 많이 등장합니다.
'세종실록' 1419년(세종 1년) 7월 17일조에는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했으니,
본래 우리 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다
(對馬爲島, 隷於慶尙道之?林, 本是我國之地, 載在文籍, 昭然可考)"는 상왕 태종의 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태종은 이어 "다만 그 땅이 매우 작고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이 살지 않았는데,
왜인 중 그 나라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자들이 소굴을 삼은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같은 책 1444년(세종 26년) 4월 30일조에는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목마지(말을 기르는 땅)"라는 기록이 등장하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만든
'팔도총도' 등 많은 지도들에도 대마도는 조선 영토로 표시돼 있습니다.
고려시대부터 대마도 영주였던 종씨(宗氏)는
한·일 양국 사이에서 중계 무역의 이득을 취하면서 왜구의 본거지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조선은 1419년(세종 1년) 1만7000명의 군사로 대마도를 정벌한 뒤 영토로 편입하거나
직접 세금을 거두는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으나 이곳이 경상도에 예속된 속방
즉 조선의 땅이라는 의식을 계속 지니고 있었습니다.
15세기에 대마도는 계속 조선에 조공을 바쳤고,
16세기까지도 대마도주는 정기적으로 조선 국왕을 알현하는 사신을 보내
조선으로부터 관직을 임명 받았습니다.
그후 임진란이후 200년동안 한일간의 교량 역할을 하다가...
대마도가 일본 정부에 정식으로 편입된 것은
1868년, 메이지 일왕 때의 일이었습니다.
손승철 강원대 사학과 교수는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내놓는 근거보다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다는 역사적 증거가 훨씬 풍부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내용은 인터넷에서 발췌한 자료를 요약한 내용입니다.
다른 이런저런 자료와 여러가지 지도(地圖) 에도
대마도가 조선땅으로 명시 되어 있는걸 보았습니다...
약 150년전 1868년에서야 정식으로 일본령에 편입되었다는걸 보면..
일본에서도 한국땅이라 여겨온것 같습니다.
그후 현대에 들어와서 ...
이승만 대통령은 포츠담회담에서 불법으로 점유한 땅을 다 돌려 주도록 되어있으니
대마도를 돌려 달라는 요구를 외교적으로 수차례 하다가
6,25전쟁으로 시지부지 되었다는 기록도 보았습니다.
기록도 미흡하여 저는 잘 알수 없지만...
대마도가 우리땅이란 나름데로의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 이곳 까페의 성격으로 보아 더 이상 논할 자리도 아니고..
또 제가 가방끈이 짧아 아는것이 없습니다마는..
앞으로 더욱 관심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대마도도 기회 있으면 한번 가 보려고 생각 했습니다.
저는 매우 소중한걸 느끼고 배웠습니다.
전쟁때마다 당하기만 하다가...
함선을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 했다는 것이 정말 통쾌하다고 느껴기도 했구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장군....
이종무 장군 묘역의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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