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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강한 삶

"심곡서원"과 "조광조묘및 신도비"

 "심곡서원"과 "조광조묘및 신도비"


오늘 우리 동네에 있는...

조광조의 위패가 모서져 있는 "심곡서원"과 .. "조광조 묘"를 다녀 왔습니다.

 

먼저....조광조와 당시 시대 상황을 간단 요약 하여
"심곡서원"과 "조광조묘및 신도비"의 의미를 이해 하려 합니다.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
그의 폭정 12년을 그의 신하들이 참지 못하였지요..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낸 성희안(成希顔)과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박원종(朴元宗)이 주축이 되어

 12년간 폭정으로 국가의 기틀을 흔들어 놓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연산군 이복동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을 왕(중종)으로 추대한 사건이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이라 한답니다.


이후 정치는 많은 개혁이 요구 되었으나..
어부지리로 18세에 왕이된 중종은 큰힘을 쓰지 못하였고..
중종반정의 공신들은 또다른 세력으로 등장 하여
권력형 비리가 많이 발생 하게 되었답니다.


중종은 즉위한후 8년여가 지나 .. 주요 반정 공신들이 사망하면서
중종의 의지데로 본격적인 정치 개혁에 착수하였으며...

 중종이 이때 주목한 인물이 "사림의 영수"로 있던 "조광조"였답니다.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유교적 이상정치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였으며

 중종반정을 주도한  훈구 세력의 잘못된 정치 관행과 권력형 비리까지 문제시하면서

새로운 조선 사회를 창조하려고 하였답니다.

 
 조광조는 개혁에 걸림돌이 되는 훈구세력중
 작호가 부당하게 부여된 76명에 대하여 그 공훈을 삭제할 것을 주장하게 되었지요.

 

이미 기득권을 가진 훈구세력이 가만히 있을리 있겠나요?

 

나뭇잎에 꿀을 발라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 글씨를 쓰서 벌레가 파먹도록하여 
‘走肖 즉 ‘趙’씨가 왕이 될거라는 모략을 꾸며 ... 조광조를 향한 중종의 마음을 돌리게 하고

조광조와  추적세력 70여명에게
사약을 내린 사건이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중종 14년)랍니다.

 

이렇듯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미완으로 끝났답니다.
38세에 그가 먼저 가 버린 것이죠..

 

 

 

 

 [수지의 유형문화재]  심곡서원


 

 

 

 

 

 

 

 

 

마침 유림의 원로들이

사당앞에서 절을 하고 나오시더군요.

 

 

 

이곳에는 경기-용인-25호로 지정된 노거수 두그루가 있어

담아 왔습니다.

 

 

 

 

 

 

 

[수지의 유형문화재] 조광조묘및 신도비
 
"심곡서원"에서 걸어서 약 5분거리..
맞은편 광교산 자락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약 20년전에 이 묘역이 새롭게 단장된듯..
아래 사진과 같이 잘 정비되어 있더군요.

 

 

 

 

 

 

 

 묘에 올라가는 중간 지점에 "신도비"가 있습니다.
비석 앞뒤로 잘잘한 한문글씨로 빽빽히 조각되어 있는데...


이 비문내용을 인터넷에서도 쉽게 찾을수가 없어
함께 하지 못함이 아쉽네요.


 

 

 

 

 조광조 부부합장한 묘지 봉분위에 삘기인지 하얀 풀꽃이 바람에 휘날리는것이 인상적이었다.

 

 

 

 내려 오는길에 보니...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소나무 한그루가 허리가 꺽인 모습에서
"조광조"의 모습을 연상 했으니....


 

 

 

우리동네에는 예로부터 명당이어서인지...

선열들의 묘지가 많습니다.

범위를 넓힐뜻은 없으나...

우리동네 "수지"관내에 있는 문화재는 모두 찾아 볼 생각입니다.

 

 


사진 : 12. 11. 14  심곡서원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