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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강한 삶

탄금대 전투(彈琴臺戰鬪)

신립[申砬]의 탄금대 전투(彈琴臺戰鬪)


오랫만에 여기 "탄금대"를 방문했다.


이곳은 가야사람 "우륵[于勒]"이 가야금하나 들고 신라로 귀화했을때 ...
신라 진흥왕은 반가워 하며 이곳에 살게 하였는데
그의 가야금소리에 연유하여 탄금대 (彈琴臺)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후 세월이 흘러  이곳은 임진왜란당시 ..
신립[申砬]장군이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싸웠던 ...
임진왜란사에서 가장큰 육상전투의 결전장이었다.


탄금대를 한바퀴 돌며 당시의 상황이 궁금하여
패전(敗戰), 패장(敗將)에 대한  마음아픈 이야기지만 간략히 요약해 둔다.





신립[申砬]의 탄금대 전투(彈琴臺戰鬪)



1. 상황 :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난후 ..


부산에 상륙한 왜군 대병력이 파죽지세로 북상해오자
조정에서는 4월 20일 신립[申砬]을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로 임명하여 이를 막게 하였다.


신립의 군대는 기병 약 3,000명으로
 도성을 떠나 남하하면서 추가 군사를 모아  총 8,000여명으로 충주에 도착한 뒤

4월 24일 부장 몇사람과 조령으로 달려가 형세를 살필 때,
먼저 경상도로 남하하였던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서 패하여 돌아왔다.


이때 종사관 김여물 등이
 “적은 수의 병력으로 왜적의 대군을 방어할 곳은 마땅히 지형이 험한 조령뿐이다.”라고 하였으나,


신립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이곳에서는 기병을 쓸 수 없으니 마땅히 평원에서 일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6일 그는 드디어 충주의 서북 4㎞ 지점에 있는 "탄금대"에 배수진(背水陣)을 쳤으니,

이는 적이 보병이고 아군은 기병이므로 개활지에서의 전투가 유리하다고 판단하였고,


또한 아군 병력이 대부분 훈련이 미숙하여
배수진을 치고 싸워야 용감하게 싸울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2. 전투 :


한편, 소서행장이 거느린 왜군은 27일 이미 조령을 넘어 단월역에 이르렀다.


충주목사 이종장과 순변사 이일이 척후로 나갔지만
적군에게 길이 막혀 신립은 적정을 정탐할 시간도 없었다.


 28일 새벽 왜군은 부대를 나누어 본진은 충주성에 돌입하고,
좌군은 달천 강변으로 숨어 내려왔으며,
우군은 산으로 숨어 동쪽으로 나가 강을 건넜다.


신립은 당황하여 충주성으로 급히 말을 달렸으나,

병력과 무기에서 열세일 뿐 아니라 군대의 전열이 미처 정비되기도 전에
성 안의 왜군이 나팔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출격하여 조선의 관군은 크게 패하였다.



신립은 탄금대로 돌아와 이 사실을 보고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고,
이종장과 김여물도 신립의 뒤를 따라 전사하였다.


이틀만에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전멸 하였다.








3. 분석 :


1. 신립장군은 당대 최고의 장수 였으며 ...
북방의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기마병으로 많은 승리를 한 경험을
너무 과신하였는지 전장터의 여건에 연구가 부족했고 전투 준비할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2. 군사의 대부분이 훈련된 전투병이 아니었다.
기병도 여진족을 물리치던 함경도 전투의 주력이 아니고 한양의 비전투 기병이었다.
한양을 지키던 소수의 갑사(甲士)가 정예병이었고 나머지는 급조된 병력이었다.

특히 이동간 급조된 징집인원 5,000여명은  장비도 미약했고 지휘체계도 미약했다.
노무자 수준이었다. 전투준비 하기도 전에 당했다.


3. 주력인 기병이 활동하기좋은 평야 지대를 선택 했지만
  4월말의  논이나 강변 지형은  땅이 질퍽이고 평탄치 않아 기마의 기동이 매우 어려웠다.


4.당시  일본군은 조총을 가지고 있었다.
한발 사격하고 총구를 딱아야 했고 실탄을 재장전 하는데 2-3분이 걸리는
 연속 사격성능이 열악하기는 했지만 .. 
체계적인 3열 횡대 부대로 교차사격을 함으로 위협적으로 대항해 왔다.
이러한 조총의 사격 능력을 과소평가 했다.


5. "탄금대 배수진이 전략적 실패다" .. "조령(문경세제)에서 막았어야 했다"라고  ....
이야기 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는 결과론이다.


   조령에서 전투를 했더라도 이또한 쉽지 않았을것이다.


주력인 기마병으로는 산악전투엔 부적합 했으며 
급조된 병사들의 이탈이 많았을 것이다. 통제가 어려웠을 것이다.



6, 이 전투는 임진왜란사에 보기더문 정규군의 육상전투였으며...
신립과 소서행장의 직접대결 전투였으며 ...
기병과 보병의 전투 ... 활과 소총의 전투... 평원의 배수진 전투였으며
비참한 패배의 전투였다.




4. 결과 :


1.  신립 군대의 항전은 전멸했고  왜군은 충주성에 무혈 입성하였다.

2. 신립의 패보가 조정에 전해지자  국왕은 서울을 떠나 의주로 몽진(피난)하게 되었다.









지금 그자리엔 "팔천고혼 위령탑"이 있다.







신립장군이 투신한 장소와 순국비의 모습이다.











그러나 지금 이 지역은 송림 우거진
충주댐 상류의 명승지로 지정되어 평온하기 그지 없다.















사진 : 2019. 11. 16일 충주 "탄금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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