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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강한 삶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

                                                                   자료 :두산백과에서 발췌 요약

 

*  소치 동계올림픽 김연아 중계시간(02:30분)을 기다리며....

 

 

고려말 당시 국제상황

 

1368년 주원장(朱元璋)이 난징[南京]에서 명(明)나라를 건국한 뒤  

元나라의 세력을 북쪽으로 몰아낸 뒤에는

"親明 反元"을 고려에 요구 하였다.

즉,  원(元)나라를 멀리하고 明나라를 섬기라는 것이었다.

 

고려 우왕(禑王)은 원나라, 명나라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양단 외교를 추진하며

 두 세력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 했으나,

그동안 우방이었던 元나라는 몰락의 길을 걷고

明나라는 요동반도까지 점령하여 고려에 대해 직접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북쪽에서는 홍건적의난이 남쪽에서는 왜구의 침범이 빈번 하였던 

국가 안보가 위험한 상황이었다

 

 

 

요동정벌과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당시  고려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최영(崔瑩)장군은

원나라의 요청에 따라  명나라의 침략에 능동적으로 맞서기 위해 요동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였다.

 

당시 고려 우왕은  5만 여명의 군사를 징발하여 요동정벌군을 구성하였으며,

최영을 총사령관인 팔도도통사(八道 都統使)로 삼고,

 조민수(曺敏修)를 좌군 도통사(左軍 都統使)로,

이성계(李成桂)를 우군 도통사(右軍 都統使)로 삼아 진군토록하고

 

우왕과 최영장군은 서경(현, 평양)에 머물며 전쟁을 지휘하고 있었다.

 

 요동 정벌군은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威化島)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압록강의 물이 불어나 강을 건너기 어렵다며 진군을 중단하고 14일을 머물렀다.

 

 그리고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하여

 ①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다(以小逆大)

②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夏月發兵)

③ 온 나라의 병사를 동원해 원정을 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타서 침범할 염려가 있다(擧國遠征, 倭乘其虛)

④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시달릴 염려가 있다(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는

 

 이른바 ‘4불가론(四不可論)’을 주장하며

요동 정벌을 중단하고 철병(撤兵)할 것을 건의 하였다.

 

그러나 서경에 있던 우왕과 최영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속히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이성계와 조민수는 정변(政變)을 모의하여 음력 5월 22일 회군을 결행하였다.

 

 우왕과 최영은 당황하여 서경을 떠나 수도인 개경으로 급히 돌아가

반격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위화도를 떠난 지 9일 만인 음력 6월 1일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끈 반란군은

개경 부근까지 진군했으며,

 

 2일 후에는 개경을 함락시키고 우왕과 최영을 사로잡아 유배시키고

창왕(昌王)을 세웠다가 그후 다시  공양왕(恭讓王)을 새로 왕으로 세우며...

 

 이성계가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정몽주와의 관계

 

명나라와 전쟁을 주장하는 최영파와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하자는 이성계파가 나뉘었을 때

 정몽주는 이성계파와 의견을 함께했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가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할 때에도

뜻을 같이했다.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 정몽주는 승진하고 공신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분명해지자

더는 같은 길을 갈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고려를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은 같았고,

왕을 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급진적인 성향도 다를 바 없었지만, 

고려왕조는 지켜야 한다는 게 정몽주의 신념이었다.

역성(易姓)혁명을 꿈꾸는 이성계와 정도전은 이제 그의 정적이 되었다.

 

1392년 3월,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몽주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해야만 고려의 사직을 보존할 수 있다고 판단한 정몽주는

우선 언관들을 시켜 정도전∙조준∙남은 등 이성계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당시 유배 중이던 정도전은 감금시키고,

조준∙남은∙윤소종 등은 귀양을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후에 조선3대 태종)은

 이성계가 머무는 해주로 급히 달려가 아버지의 귀경을 재촉했다.

이성계는 부상당한 몸을 가마에 싣고 그날로 돌아왔다.

 

정몽주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병문안을 핑계로 직접 이성계를 방문했다. 

이성계는 평소와 다름 없이 정몽주를 맞았지만, 이방원의 생각은 달랐다.

 

그날 정몽주와 이방원의 만남에서

[하여가]∙[단심가]라는 詩와 함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이방원은 술상을 차려놓고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았다.

이 詩가  하여가(何如歌)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 년까지 누리리라

 

 

 

자신들과 뜻을 함께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정몽주는 단호한 자신의 마음을 답가로 들려주었다.

이 詩를 단심가(丹心歌)라 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의 마음을 분명하게 알게 된 이상 그를 살려둘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조영규 등을 보내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습격하여 죽였다. 

이때 정몽주의 나이 56세였다.

 

 3개월 뒤 이성계는 공양왕을 내치고 왕위에 올라

“조선“이란 새로운 나라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