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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강한 삶

#1. “청령포” 유배생활과 “관풍헌”에서의 최후

 

 

 

[04.24] 영월에서 단종(端宗)의 원혼을 사진으로 추적해 본다

   

   

04.24일 영월지역 출사길에...

 

단종의 원혼을 추적해 보기로 작정하고 자료를 연구 하였습니다.

 

 

아무래도 서두에 간단한 역사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으네요.

 

조선의 6대 임금 단종(端宗)의 등극과 “계유정란”을 간단 요약해 보면...

 

  세종대왕은 슬하에 문종(文宗) 외에 수양대군(首陽大君),

안평대군(安平大君), 금성대군 등 8형제를 두었는데...

 

세종의 뒤를 이은 장남 문종(文宗)은 가장 학식이 높고 효(孝)가 깊었으나

 

평소 병약하여 세종대왕 승하후 삼년상을 지내고는

문종 마저 선왕(先王)의 뒤를 따라 서거 하시니,

   

당시 나이 13세의 문종의 외아들 단종(端宗:1441~1457)이

조선 제 6 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반면 성격이 활달하고 문무에 능한 문종(文宗)의 동생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이러한 형세에 자신이 권세를 잡으리라 생각하며

 

권람(權擥)과 한명회(韓明澮)를 주축으로 세를 확장하여

   

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안평대군과 김종서를 포함하여

영의정 황보인, 병조판서 조극관 등 많은 충신들을 죽이고

모든 권력을 장악 하였으며,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었지요.

 

역사는 이를 “계유정란[癸酉靖亂]”이라 기록하고 있죠.

 

 

급기야 1455년에는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물러 앉게 되고...

   

그후 ..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는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河緯地) 등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을 주축으로한 단종의 복위 시도가 발각되어

 

사육신포함 17명이 죽음을 당하고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고

 

세조 2년(1456. 06. 21), 영월.. 이곳 청령포로 유배되었습니다.

 

 

오늘 출사길에서 찍은 사진은 ...

 

#1. “청령포” 유배생활과 “관풍헌”에서의 최후

 

#2. “금몽암”과 “보덕사” 그리고 “장릉”

 

#3. “영모전”과 “충절사” 그리고 “민충사”

 

   

이렇게 나누어 사진을 게제할까 합니다.

 

허접 하지만 분량이 있는 관계 때문이죠~~

 

 

 

 

#1. 청령포 유배생활과 관풍헌에서의 최후 편

 

 

배를 타고 청령포로 들어가 두시간 정도의 시간이 주어 졌지만...

 

 

 

 

 

 

 

 

 

단종과 관련되는 사진 몇장을 담는것으로 만족 합니다.

 

 

 

 

어소

 

단종이 유배생활시 거처인 어소가 있었으나 소실되고

 

영조 39년에 비를 세워 어소의 위치를 전하고 있다.

 

오른쪽 비각의 비석이' 단묘재 본부시유지비'

 

 

 

 

 

 

 

 

 

 

 

 

 

 

 

 

 

 

 

 

 

 

 

 

   

어제시(御製詩) - 단종

 

 

 

 

 

 

 

 

관음송(觀音松)

 

 

수령이 600년이라는 관음송은 단종의 유배를 지켜 본 존재로

 

곧, 당시 처절하였던 단종의 생활을 보았으니 관(觀)이요,

 

단종의 오열을 들었으니 음(音)이라는 뜻으로 관음송(觀音松)이란 부른답니다.

 

 

천연기념물 349호로 지정되어 있답니다.

 

 

 

 

 

 

 

 

 

 

 

금표비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행동을 제한하기 위해 영조2년(1726)에 세운 비석으로

 

뒷면에 '동서 삼백쳑 남북사백구십척'의 글씨가 새겨있어

 

단종의 행동 범위를 제약하고 있습니다.

 

 

 

 

 

 

 

 

 

 

 

 

 

 

 

노산대

 

단종이 해질 무렵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던 곳으로

 

그의 호를 따서 '노산대'라 부르고 있으며..

   

 

 

 

 

 

 

 

 

 

 

 

 

 

 

 

망향탑

 

청령포 서쪽 절벽인 육육봉과 노산대 사이에 있는 돌탑으로

 

어린 단종이 유배 생활시 이곳에 올라 한양을 그리며 쌓았다는 탑이죠.

 

 

 

 

 

 

 

단종은 사실 이 청령포에서 2개월정도 유배생활을 했기에

 

특별한 유적이 없습니다.

 

   

청령포에서 조금 일찍 나와서

  

금부도사 왕방연의 시조를 새긴 시비와

새로 지은 홍보관 내부를 둘러 보았습니다.

 

   

 

11:00시에 버스로 이동하여 "선돌"을 촬영하고 돌아와

 

영월 읍내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다른 일행분들은 모두 "요선암"으로 촬영을 갔는데....

 

저는 계속 단종과 관련있는 장소를 더듬아 보았습니다.

 

 

   

◇ 단종이 최후를 맞은 관풍헌(觀風軒)과 매죽루

   

 

강원도유형문화재 26호로 지정된 관풍헌(觀風軒)...

 

관풍헌은 1392년(태조 1)에 건립된 영월 객사의 동헌 건물로

지방 수령들이 공사(公事)를 처리하던 건물이랍니다.

   

단종의 청령포 유배생활 2개월이 되었을 무렵 ...

 

이 지역에 큰 홍수가 나서 청령포가 침수될 위기에 이르자  

거처를 이곳 "관풍헌"으로 옮겨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답니다.

   

관풍헌과 매죽루를 자세히 살펴 볼려 했는데....

 

출입문이 잠겨 있어 담 넘으로 사진한장 담았을 뿐이네요.

 

왜 잠겨 있어 아쉬움을 줄까요~~?

 

 

 

 

 

 

 

 

 

 

 

단종은 관풍헌에 거처하는 동안 관풍헌 동쪽에 위치한 매죽루에 자주 올랐는데

 

 

 

 

 

 

이곳에서 자신의 슬픈 처지를 두견새((子規)에 빗댄 

"자규사(子規詞)"를 읊었다고 전합니다.

 

누각의 한 쪽에 이 “자규사(子規詞)”가 액자로 되어 걸려 있다는데... 

직접 보지 못하고 ..그 내용만 여기에 옮겨 봅니다.

 

 

 

자규사(子規詞)

 

달 밝은 밤에 두견새 울 제 月白夜蜀魂啾

시름 못 잊어 누대 머리에 기대었네 含愁情依樓頭

네 울음 하도 슬퍼 내 듣기 괴롭구나. 爾啼悲我聞苦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 없을 것을 無爾聲無我愁

세상에 근심 많은 이들에게 이르노니 寄語世上苦榮人

춘삼월 자규루에는 부디 오르지 마오. 愼莫登春三月子規樓

 

   

이런 연유로 매죽루는 "자규루(子規樓)"로 이름이 바뀌었고...

 

영월의 곳곳에는 두견새(자규) 그림이 여기저기 그려져 있답니다.

 

 

 

 

 

 

단종이 관풍헌에서 유배생활을 하는동안 ...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함과 동시에

 

유배된 단종마저 이곳에서 사약을 받아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네요.

 

 

그 시체는 강에 버려졌는데 ....

 

밤에 영월의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몰래 시체를 건지어

 

제 어머니를 위해 짜두었던 관에 넣어

 

북으로 오 리쯤 되는 곳에 평토장을 하고 돌을 얹어 표하여 두었다고 합니다.

 

 

 

 단종이 살아서 영월에 머문 기간은 불과 “넉 달” 남짓이죠.

   

1457년 6월 21일에 유배를 와서  

청령포에서 두달 ...이곳 관풍헌에서 두달정도 유배생활을 하다가 

1457년 10월 24일 사약을 받았으니...

 

 

17살의 어린 왕이 삼촌에게 쫒기어

유배생활끝에 사약을 받다니~~~!!

  

나이어린 조카를 삼촌이 이렇게 비참하게 죽이다니~~!!

  

  

한 많은 인생을 산 어린 임금은 갔지만

 

시체라도 찾아 묘라도 써 주었다면

원한이나 없을 터인데....!!

 

 

 

단종에게 먹일 사약을 가지고 행차하였던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의 죽음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지은 시조를 새긴 시비가

 

청령포가 내려다 보이는 맞은편 언덕에 세워져 있습니다.

 

 

 

 

 

 

 

 

 

 

 

 

 

 

 

 

#1.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