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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경사진

거문도사건[ 巨文島事件 ]과 영국군 묘지, 역사공원

거문도사건[ 巨文島事件 ]과 영국군 묘지,역사공원




* 거문도 사건


  1. 개요


1885년(고종 22) 3월 1일부터 1887년 2월 5일까지

영국이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사건.



 2. 역사적 배경


 러시아는 크리미아전쟁 이후  침략의 방향을 아시아, 특히 태평양으로 전환하였다.

그리하여 1860년에서 1900년에 이르는 약 40년간 일본·한국·중국의 연안지를 대상으로,

 태평양 진출 계획의 일환인 부동항(不凍港) 획득을 기도했다.


한편, 영·러 간에는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된 때였다.

 러시아는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아라비아해로 진출하고자 하였는데,
 아프가니스탄을 보호령으로 삼고 있던 영국과 충돌하게 된 것이다.


1885년초 영국이 지원하는 아프가니스탄군과 러시아군 간의 전투가 개시되면서,

 조선에서도 양국의 충돌 위기가 예상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영흥만 점령 계획설이 나돌면서,

영국도 러시아에 대해 견제하는 수단으로 거문도 점령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남하 정책과 대립하고 있던 영국·청나라·일본 세계 각지에서는

 러시아에 대해 경계를 소홀히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3. 경과


영국은 1885년 음력 3월 1일 갑자기 세척의 동양 함대를 파견하여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였다.

거문도를 이루는 3개의 섬 중에서 당시 무인도였던 고도를 선택하였다


 영국은 거문도 점령의 공식적인 이유를 러시아의 점령에 대한 예방 조처라고 설명하였지만

당시의 러시아 측의 형편을 고려하면 오히려 러시아에 대한 공격적인 대처였다고 볼 수 있다.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군은 영국기를 게양하고 포대와 병영을 쌓는 등 섬 전체를 요새화 하였다.

섬 주위에는 수뢰를 부설하고 급수로와 전선을 가설하였다.

그 밖에 해문 공사를 벌이고 동도의 남단과 고도를 연결하는 제방 축조 공사도 벌였다.


거문도 주둔군은 때에 따라 200∼300명에서 700∼800명으로 증가하였고

정박한 군함도 5∼6척에서 10척까지 증가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사건의 해결 교섭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고

청나라·영국·러시아 3국의 상호 교섭에 의존할 뿐이었다.


점령 초에 청나라는 러시아에 대한 방비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국제적으로 보장받으려는 계산 아래,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은근히 인정하려는 태도를 취하려 했다.
 

 일본 역시 조선 문제에 있어서 영국의 위협이 청·러의 위협보다 가볍다고 판단하여,

 적극적인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는 않고 형세만 관망하였다.


 또한, 미국도 영국의 행위를 동조하는 처지에 있었다.


영국은 당초 청나라와 교섭하여 거문도를 조차할 계획이었으므로,

 3월 14일증기택에게 거문도 협정 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조선 문제에 결정적인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던 이홍장(李鴻章)은

거문도사건으로 인해 러시아와 일본이 제각기 조선 내의 영토 점령을 요구하고 나설 경우에

국제분쟁으로 커질 것을 우려, 영국의 거문도 조차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4. 결과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면서

러시아도 제주도 등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이홍장 또한 거문도사건이 국제 문제로 커질 조짐을 보이자

 조선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할 목적에서 적극적으로 사건의 중재에 나섰다.


한편,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대한 비난이 고조되던,

4월말부터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대한 영·러의 협상이 개시되어 영·러간의 긴장이 크게 완화되었다.

 더욱이 8월 2일에는 아프가니스탄 협정이 조인되어 영국의 거문도 점령의 명분이 없어졌다.


영국 해군도 거문도에 대한 군사적인 평가를 실시,

거문도가 군항 내지 급탄소로서 적당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청나라가 다른 나라들로 하여금 거문도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하는 보장만 해주면

 거문도에서 철수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여기에 희망을 얻은 이홍장은 같은 해  주청러시아공사 라디젠스키(Ladygensky)와 회담을 하였다.

 회담 결과, 영국이 거문도에서 철수한다면

러시아는 조선 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3개조의 약속을 러시아로부터 받아 냈다.


청나라는 10월 5일부로 영국 공사관에 러시아 측의 보증을 전달하고

영국의 거문도에서의 철수를 촉구하였다.


 영국은 청나라를 중재자로 하여 몇 차례 교섭을 벌인 뒤,

10월 29일에 철수 의사를 청나라에 통고하였으나, 조선 정부에는 11월 28일에야 통고하였다.


이에 따라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은 1887년 2월 5일이었다.
 



5. 의의와 평가


거문도사건은 영국 대 러시아라는 제3국 상호간의 정치적 야욕에서 발단된 사건이었다.

하지만 주권국인 조선의 양해 없이 점령이 감행된 점과


처리 과정에서도 조선 정부를 배제하고 열강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외교 교섭이 진행된 점에서,

 조선의 허약한 국제적 지위가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으로 러시아의 조선 침투에 제동이 걸리기는 하였지만,

사건 해결에 있어서 중개 역할을 맡았던 청나라는

더욱 더 종주권을 과시하여 조선의 내정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글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에서 요약발췌





* 영국군 묘지와 역사공원



거문도의 중앙 조그만한 "고도" 뒷산에

아래와 같은 입간판이 보인다.


말은 테니스장이지만 ...

이 옆의 "거문초등학교"가 당시 주둔지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이었다.





조금더 올라가면 영국군 묘지가 있다.



 그들이 세운 녹색의 설명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186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영국 해군 함정과

상선이 거문도에 드나들었고

1885년 부터 1887년까지는 영국 해군이 이곳에 기지를 두었던 동안과

 그 후 몇해 동안에 영국 해군 사병과 해병대원 10명이

이 섬과 근처 해역에서 사망하여 이 섬에 묻혔다

1886년에 사망한 두명과 1903년에 사망한 한 명의 해군 병사의 기록은

 이 비문에 새겨져 있으나 나머지의 묘지는 알길이 없다

주한 영국 대사관 한영협회, 영국 부인회는

한영수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1983년 패를 세웠다"



좌측 화강암의 비문에는

‘1886년 3월 11일 알바트로스호의 수병 두 명 우연한 폭발 사고로 죽다.

 윌리엄 메레이(William J. Murray), 17세 소년 찰스 댈리(Chales Dale)’라고 새겨져 있고


 우측의 또 다른 십자가의 비문에는

‘1903년 10월 9일 알비온호 승무원 알렉스 우드(Alex wood) 잠들다’라고 새겨져 있다.









그 옆에 있는 조형물은 이 지역을 "역사공원"으로 조성을 하며

  "동방의 아침"이란 작품 조형물 이다.






조형물 앞에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주민과 영국군이 함께 찍은 사진도 기록으로 남겼다.







당시 영국군이 정부하고는 협의를 하지 않아 무단 점거가 확실하다.

그러나,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 한다는 명분이 확실했고

청나라를 통해 임차협의도 했다는 기록도 있더군요.


이 지역에 주둔하는동안 ...

 점령군으로서의 행동이 없었고

막사와 병원을 지을때 주민 노동력에도 급여를 주었고 ..

심지어는 식수를 먹으면서도 돈을 주었으며,,

대포소리에 고기들이 놀랐다는 항의에도 모두 보상을 했다는 자료도 보았다.


지금도 이곳에 매년 성묘를 하면서 거문초등학교에 장학금을  전달 한다고 하네요


주민들도 나쁜 감정이 아닌 역사로 받아 드리는것 같다.








그래서 ..공원이름도 "역사공원"으로 명명 하였고

우호적인 추모비도 세운것 같다.


나라가 있어도 자기 땅을 지키지 못했던 당시 현실이 안타깝다.

현장까지 와 볼 능력은 있었는지?




공원을 한바퀴 돌며 ...



<밖노루섬, 안 노루섬>
























<밖노루섬>




사진 : 2019. 03. 01 오후에 ...